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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누가 내 인생에 빨리감기 버튼을 눌린걸까 세상에나,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니 2021년 1월 5일이다. 지난 2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 내 삶은 마치 늘어진 테이프 마냥 흘러갔다면, 2020년의 마지막 2달은 마치 빨리 감기 버튼을 눌린 듯, 모든 게 지나가버렸다. 빨리 재생되는 속도에 후렴구도 가사도 모두 음미할 놓쳐버린 것 같다고 할까나. 그 버튼은 내가 눌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지막 두 달간은 마치 요동치는 파도 위, 홀로 남겨진 보트 위에서 비바람을 들이맞으며 사투를 벌였던 시기였다. 그 사투는 육지로 돌아가기 위함도 아니오, 미지의 장소를 찾는 것도, 만선을 위함은 더욱더 아니었다. 그 사투는 단지 눈을 뜨기 위함이었다. 그 눈을 떠 내 위치가 어디인지, 내가 어디에 발을 들인 것인지 알기 위해 말이다. 2배속으로 재생하던 내..
#12 인연이란 건 확률로도 계산될 수 없는 것 아닐까 인연이란 건 참 신기한 것이다. 5천만 국민 중에 평범한 한 사람이, 16,000km가 떨어져 있는 나라의 3천만 국민 중에 한 명을 만난다는 것은 더욱이. 약 3년 전에 리마에서 나의 고객으로 만난 50대의 아저씨가 있다. 아레키파에서 올라오신 분인데, 짧은 시간이지만 그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가고 본인에게 딸 2명이 있는데, 연령대도 비슷하고 딸들이 한국에 관심도 많으니까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을 전해주셨다. 너무 쑥스럽게도, 딸들을 위한 동영상도 찍어 달라고 하셔서 정말 부끄럽지만 짧은 인사말을 건네는 영상을 남기고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몇 달뒤, 고객분, Palomino 아저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딸 한 명이 리마에 올라가는데, 같이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고 하셨고, 거절하기..
#11 10월의 끝자락 센치한 밤 아니고, 센치한 오후 오늘의 업무가 끝이 났다, 생각보다 아주 빨리. 주말이 왜 이틀씩이나 존재하는 것이냐 불평하며 따분한 이틀을 지내다가, 월요일 아침이면 아드레날린을 뿜어내며 일을 시작하며 내 온 열정을 쏟아 부어내던 그 어느 해가 문득 기억난다. "이번 주말은 미쳤습니다!" Este fin de semana es una locura 라는 시선을 끄는 기사를 잠시 바라본다. 할로윈 임과 동시에 보름달이 뜨며, 서머타임 해제로 시간까지 바뀐다. 그리고 11월 3일 대선을 앞두고 모든 게 어수선한 상황이기에. 어제 저녁 산책길, 둥그렇게 완성되어가던 그 달이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간다. 원치 않지만 주어진 여유에 문득 구글 사진첩을 들여다 본다. 새집으로 이사를 오자마자 락다운이 시작되면서 '인생에 어떻게 모두에게 똑같은 기간..
#10 때로는 맛이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나보다 하필이지 이불빨래를 했는데, 그게 마침 장마기간에 걸려 마르려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때아닌 장마기간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젖은 이불이 나인 것 같은 그런 나날이다. 요즘은. 일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Pizzas, Burrito, Tacos가 적혀있는 허름한 1평 남짓한 가게를 매번 지나가다가 이번엔 멈춰 섰다. 가게를 들어서자마자, 주인아저씨가 너무도 반겨주었다. 오랜만에 온 손님처럼. "Hola, Hermosa!" 이름을 물어본다. 아저씨의 영업스킬인가 보다. 아저씨가 나름에 호구조사를 이어나간다. 난생처음 보는 피자집 아저씨에게 오늘 내가 힘들었던 이야기를 보따리 꺼내듯 털어놓는 나. 지친 하루 일과가 끝나고, 기다리는이 들어주는 이 없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9 내가 죽인걸까? 아님 네가 이 겨울을 견디지 못한 거니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작은 화원이 있다. 이사 오고 나서 4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그 화원에 들려서 맘에 드는 녀석들을 데리고 왔다. 주인아저씨에게 물으니 이름은 스페인어로는 Boca de sapo로, 한국어로는 금어초라고 한단다. 개구리의 입처럼 생겨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무거운 화분 4개를 양손으로 들고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느낌으로 설레며 돌아왔다. 이 녀석들의 취향을 검색해보았다. 목이 자주 마른 녀석들인지, 일광욕을 좋아하는가? 아니면, 그늘 밑에서 쉬는 걸 좋아하는가. 금어초에 대한 탐색전을 마쳤다. 내방의 빈 구석에 자리 잡은 네 명의 친구들을 내 나름의 정성대로 보살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햇살을 주기 위해서 커튼을 열고, 해가 더 오는 자리로 시간마다..
#8 원하는 게 있다면, 밥그릇을 집어 던지듯 표현해봐 내가 사는 아파트 뒤편에는 큰 주택 하나가 있는데, 갈색 래브라도 한 마리가 살고 있다. 한 번도 가까이서 본 적은 없지만, 창문 너머로 항상 보이는 친구이다. 몇 번이고 웃음을 주는 이 녀석이 참 마음에 든다. 어떻게? 아침이고 오후이고 저녁이고, 배가 고플땐 자기의 스테인리스 밥그릇을 입에 물고 서성인다. 가끔은 집 지붕 위를 밥그릇을 물고 걸어 다니기도 한다. 그렇게 주인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그 스테인리스 밥그릇을 입으로 집어던져버린다. 주인에게 욕구를 표출하는 최후통첩이다. 스테인리스가 바닥을 땡그르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녀석의 귀여운 투정 소리이다. 자기표현이 너무나 명확하고, 기본에 충실하며 한결같은 이 녀석이 매번 눈에 들어온다. 강아지 마저도 자신이 원하는 걸 그렇게 표현하는데, 우리의..
#7 동네 구멍 가게와의 전쟁 스페인어 bodega라는 단어는 와인 저장소라는 단어로 주로 쓰이지만, 이곳 페루에서는 '작은 식료품 가게'의 뜻으로 쓰인다. 한마디로 동네 구멍가게 정도쯤이라고 할까.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내에 보데가(bodega)가 5군데나 있다. 3월 중순부터 락다운을 시작하면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고, 개인 자가용은 쓸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보데가에서 구매를 자주 하게 되었다. 처음 방문한 1번 보데가 주인과 인사를 하는데 1번 보데가는 이번에 새로 오픈을 했다고 한다. 1번 보데가에서 겪은 일은 이러하다. 쓰레기봉투를 구매하려 했는데, 재고가 없어서 내일 들고 온다고 한다. 가격은 장당 30 centimos(100원)이라고 한다. 다음 날, 쓰레기봉투를 사러 다시 갔다. 재고는 있다. 하지만 가격은 50 ..
#6 예측 가능한 대화, 지겹지도 않니 이제는 말이다, 페루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행위는 마치 3년 정도 콜센터에서 근무해 작위적으로 반복된 대답을 하는 것과 동일시된다. 뻔하디 뻔한 말과 그 대화의 흐름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가 된다. Case 1. 북한에 관심이 많은 유형 Desconocidos(낯선이들): 안녕, 넌 어디서 왔어? 나: 한국에서 왔어. Desconocidos: 오, 한국? 남한 아니면 북한? 나: 남한에서 왔어 Desconocidos: 북한이 그 공산주의 국가지? 나: 응 Desconocidos: 아, 그 독재자 이름이 뭐였더라? 그 정신 나간 놈(loco) 말이야. 나: 김정은? Desconocidos: 어, 맞어!! 걔가 그 미사일도 쏘고...(중략) 대화 종료. Case 2. 또 북한에 관심이 많은 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