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쓰기

(14)
#5 초두효과, 다시 너와 사랑에 빠져본다 초두효과(Primary effect)는 말 그대로 처음의 느낌이나 경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첫 남미 여행 때 방문했던 아레키파는 내게 강렬하게 각인되었고, 그래서 애틋함이 더 있었나 보다. 페루가 좋냐고 가끔씩 물어보는 페루 사람들의 질문에 '아레키파가 페루에서 최고의 도시야!!'를 남발하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옛날의 잔상을 좇아 또 인생에 새로운 챕터를 쓰고 싶어 아레키파에 왔지만, 오면서 교통사고가 나며 우여곡절을 겪었고, 예상치도 못한 쿼런틴이 시작되어 길고 긴 봉쇄기간 동안 갇혀지내면서 인정하기는 싫지만 힘든 시간들이었다. 6개월 동안 매일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던 그 날씨는 마치 내가 갇혀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줄 때도 있었다. 리마를 잠시 동안 다녀와서 아레키파를 돌아오는 길이..
#4 영원한 건 존재하지 않는다 리마에 살 때 쉐프 Gaston Acurio 의 식당 Panchita는 예약 없이 두 번 방문했음에도 번번이 자리가 없어 발걸음을 돌려야 했는데, 그 레스토랑의 식사를 배달업체 Rappi를 통해서 집에서 편하게 시켜먹을 수 있고, 뿐만 아니라 파인 다이닝들은 할인까지 제공해 배달을 하고 있다. 세계 6위의 레스토랑 Central은 몇 달 또는 몇 주전에 예약이 아니라 단 3일 전에 예약으로 다이닝이 가능하다. 바다가 보이는 말레꼰에 위치한 테니스장은 아침 수업은 자리가 없어 등록을 할 수 없었는데, 아침에 산책 때 지나가며 본 테니스장은 텅텅 비어있었다. 관광객들로 가득찼던 Larcomar 쇼핑몰은 스산한 기운이 감돌 정도로 고요했다. 호텔들은 여러 프로모션을 제공하고 있고, 비행기 예약을 변경하는데 수..
#3 팬데믹이 덮친 리마, 내가 아는 그 도시가 더이상 아닐 때. 여름을 지나 늦은 가을, 맛있게 익었기를 기대하며 한 입 베어 문 감이 너무 떫어 나도 모르게 "아 떫어!"를 외치며 입 안의 텁텁한 감각을 느끼며 퉤 뱉듯, 6개월 만에 돌아온 리마는 회색 도시라는 그 별명에 걸맞게 햇빛도 통과하지 못하는 습하고 축축한 기운을 뿜으며 나를 맞이했고, 공항에서 나가자마자 "아 싫어!"를 정말 입 밖으로 내뱉었다. 도착하자마자, 떠나는 날이 기대되는 도시다. 서둘러 일부터 끝내고자 하는 마음이 커서 세관으로 향했고, 코로나 팬데믹이 이 도시에 끼친 영향은 서서히 몸소 느껴갔다. 오랜만에 간 Callao 세관은 2층 고객지원 부서는 아에 문을 닫았고, 일이 끝나고 미라플로레스로 오는 길, 가끔 들리던 Interbank 은행이 문을 닫아 임대 현수막을 걸어놨고, 차 막히던 P..
#2 소유란, 나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적고 많은 의미를 부여했던 물건들이 없어진다는 것. 그 사건을 통해 '소유'라는 의미를 다시 되돌아본다. 새로운 도시로 이사하기 위해 약 2년 동안 살던 집에서 나 홀로 이사 준비를 하는 과정은 실히 끔찍했다. 감히 묵은 떼를 벗겨낸다고도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2년이라는 시간이 보여주는 짐들이었다. 입지도 않는 많은 옷들, 여행을 다닐 때 들고 온 브로셔, 각종 식품들, 내가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잡화들, 많은 서류들까지... 버리기는 아깝고 하지만 누군가에게 유용할 수도 있는 물건들은 따로 빼두어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 내가 사는 아파트 경비아저씨 가족에게 넘겨주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PS4 타이틀들은 중고로 팔아버렸다. 그렇게 어느 정도 정리를 하고 또 간추렸고, 필요한 물건만 담았..
#1 자유가 어색해질 때 3월 중순부터 시작된 페루의 락다운이 단계별로 완화가 되어가고 있다. 지난 기간 동안은 매주 일요일은 24시간 외출금지였지만, 2020년 9월 20일 일요일부터 해제되었다. 물론, 완전한 해제는 아니다. 개인 자가용의 사용은 금지이며, 통금시간은 저녁 11시 이후이며, 사회적 거리두기는 여전하다. 일요일 아침, 창밖을 넘어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모습마저 어색해 보인다. 만두와 아침산책도 여유롭게 즐겨도 됨에도 불구하고, 괜스레 눈치가 보여서 여느 일요일처럼 만두의 급한 용변만 보고 죄를 지은 것 마냥 빠르게 집으로 돌아온다. 프랜치 프레스로 커피를 내리고, 와플도 구워 푸짐한 일요일 아침을 준비한다. 잠깐 책을 읽다가 또 창밖을 바라본다. 주어진 자유가 이리도 어색해질 줄이야. 늦은 점심으로 파스타를 먹고..
새로움이 빛바래져갈 때 새로운 것은 언제나 빚이 바래가고 퇴색되는 것일까. 약 3년의 시간을 리마에서 보내며, 익숙함이 실증나고 지겨워질 때, 새로움을 좆아 이곳 아레키파로 2020년 3월 10일에 도착을 했다. 아침 5시를 조금 넘으면 Misti 화산아래 아름다운 백색도시 Arequipa를 빛추는 여명과 함께 눈을 뜨고,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하루를 시작했고, 만두 역시 일어나자마자 매일 아침 창밖을 바라보며 도시 구경 그리고 동네 멍멍이들 구경에 시간가는 줄 모르며 하루를 보냈다. 2020년 9월 18일 금요일 아침의 우리는 아침 6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간, 새로움이 전혀 없는 이 도시에서 어제처럼 눈을 떴다. 만두는 더이상 창밖을 바라보며 도시를 흥미롭게 바라보지 않고, 나 역시 창문너머의 Misti 산과 도시를 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