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이다, 페루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행위는 마치 3년 정도 콜센터에서 근무해 작위적으로 반복된 대답을 하는 것과 동일시된다. 뻔하디 뻔한 말과 그 대화의 흐름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가 된다.
Case 1. 북한에 관심이 많은 유형
Desconocidos(낯선이들): 안녕, 넌 어디서 왔어?
나: 한국에서 왔어.
Desconocidos: 오, 한국? 남한 아니면 북한?
나: 남한에서 왔어
Desconocidos: 북한이 그 공산주의 국가지?
나: 응
Desconocidos: 아, 그 독재자 이름이 뭐였더라? 그 정신 나간 놈(loco) 말이야.
나: 김정은?
Desconocidos: 어, 맞어!! 걔가 그 미사일도 쏘고...(중략)
대화 종료.
Case 2. 또 북한에 관심이 많은 유형
Desconocidos(낯선이들): 안녕, 넌 어디서 왔어?
나: (더이상 남북한의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아) 남한에서 왔어.
Desconocidos: 오! 근데 그 북한이 공산국가지?
대화는 다시 Case1로 돌아간다.
Case 3. 아시아는 단일 국가라고 생각하는 유형
Desconocidos(낯선이들): 안녕, 넌 어디서 왔어?
나: 남한에서 왔어.
Desconocidos: 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여행 온 거니?
나: 일해, 여기서 작은 사업을 운영하고 있어.
Desconocidos: 중국식당(chifa)?
대화종료.
Case 4. 사생활에 관심이 많은 유형
사생활에 관심이 많은 유형들의 질문들은 주로 이러하다.
- 가족들도 여기 사니?
- 혹시 혼자 사니?
- 어디서 일하니?
받아 본 최악의 질문 중 하나는 지금 네가 사는 곳 임대니 아니면 자가니? 혹시 임대면 집을 빌려사니 아니면 방을 빌려 사니? 네가 타고 온 차 네 거니?
Case 5. 국뽕 유형
Desconocidos(낯선이들): 안녕, 넌 어디서 왔어?
나: 남한에서 왔어.
Desconocidos: 페루 어때? 좋지? 정말 아름다운 나라야. 우린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어. 아, 페루 음식 먹어봤어? 페루 음식을 먹으러 전 세계 사람들이 이곳으로 여행을 와. 우리는 안데스에서 해안 아마존 음식까지 정말 다양하고...(중략)
거짓말을 조금이라도 보태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정말로 대화의 유형은 이 다섯가지로 나눠지니까 (엄밀히 말하면 4가지일까) 질문하는 상대방의 표정만 봐도 '이렇게 답을 하겠구나' 하고 가끔은 예상이 된다. 기억나는 예상 밖의 최근 대화는 연초에 커피를 주문하는데, 앞사람과 잠깐 대화를 나누게 됐는데, " 오! 너 기생충 봤어? 아카데미 상 받았잖아. 영화 정말 인상적이었어" 정도일까.
가끔은 이어나가고 싶지 않은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공증서에서 몇 시간 동안 고객과 함께 대기해야할 때라던가. 그럴 땐 사실 질문을 받기보다는 엄청나게 질문을 한다. 고객이 운영하는 사업이라던가, 좋은 여행지를 묻는다던가 혹은 지방에서 온 고객이면 그 지방에 대해서든가.
단지, 여느때처럼 마트에 식료품을 사러 들르고 직원에게 물품 위치를 물어봤는데, 내가 이곳에 언제 왔고, 가족은 있고, 직업은 무엇이냐 등의 사적인 질문을 받을 땐 정말이지 고욕이다.
기본적인 인간관계가 싫은걸까? 아니, 아마 그건 아닌 것 같다. 질문한 사람을 다시 보게끔 하는 새로운 주제를 던져 대화를 이끌어 가는 그런 사람을 우연히 한 번 마주쳤으면 좋겠다. 길고 긴 가뭄 뒤에 온 단비처럼, 두 팔 벌려 맞이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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